2010. 9. 13. 16:49
 모든 고뇌는 시간으로 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괴로움도 두려움도 그 실체는 바로 시간에 있다. 시간을 극복하고 시간 자체에 대한 관념을 버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의 모든 곤란과 불화를 극복할 수 있다.

 암흑, 위로해줄 이조차 없는 어둠, 이는 두려운 일상의 반복 속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과연 무엇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밤이 되면 잠자리에 드는 걸까? 어린아이와 미개인, 건강한 젊은이들과 동물들은, 하루가 가고 또다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지 않는다. 깊은 사색과 고민에 빠져 보지 않은 이들은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며 즐거워하고, 이를 바꾸려는 생각 따위는 아예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생활에서 벗어나 있는 이들은 매일같이 진실한 생활을 갈망하고, 그 같은 순간이 번개처럼 내리칠 때마다 행복을 느끼며 인생 전체의 의의와 목적에 대한 모든 상념들과 시간의 의의를 마음속에서 지워버린다. 그리고 이야말로 진정 창조적인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순간은 조물주와 합일하는 순간이며, 이때는 평상시라면 우연에 불과한 것들마저도 오랜 염원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모든 순간이 어둠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 순간이 너무 밝기 때문이며, 생활이 괴롭고 옹졸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이 순간이 마법과 같이 가볍고 자유로운 희열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벨이 울리지 않거나, 난로가 그을리거나, 기계의 톱니바퀴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곧 그것을 살펴서 고장난 곳을 수리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내부의 기계, 생의 의미를 증폭시키는 비밀의 스프링과 삶과 슬픔, 희열을 느끼며 행복을  체험하는 능력을 가진 저 내부의 기계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따라서 마음이 병들면 그 무엇으로도 그것을 치료하지 못한다.

 우리는 분노, 초조함, 거짓말 등으로 인해 우리의 아름답고 짧은 생을 따분한 것으로 만든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악덕들과 우리를 추하게 만든 더러운 이웃들, 모든 부스럼은 오랜 세월을 걸친 철저한 고뇌와 괴로움의 불꽃으로불태워야  한다.

 곱사들이에 병을 앓고 있던 사내, 보피는 현자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이해와 헌신에 가득 찬 인간이었다. 그는 고뇌와 두려움을 넘어 부끄럼 없이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신에게 의지하려고 했다. 언젠가 나는 그에게, 과연 어떤 믿음으로 육체의 고통을 극복하는가를 물었다. 그러자 그는 빙긋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아주 단순합니다."

 나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어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와 병은 서로 끝없는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전투에서는 이기고, 또 어떤 전투에서는 져가며 계속해서 격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또한 때에 따라서는 움직임을 멈추고 휴전을 체결하기도 하지요. 서로의 동정을 살피거나 매복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한쪽이 다시금 위세를 부리게 되므로 또다시 싸울 수밖에없는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은 병들어 있다. 안타깝지만 당신의 병은 한창 유행하고 있는 돌림병의 일종이다. 세상의 어떤 의사들도 이 병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한마디로 이 병은 도덕적 착란증과 유사한 것으로, 개인주의 또는 망상적 고독이라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현대의 거의모든 책들이 이 병을 내포하고 있으며, 당신의 마음속에도 이 병은 존재한다. 당신은 스스로가 언제나 혼자이며, 누구도 당신을 보호하거나 이해해 주지 않는다는 망상에 젖어 있을 것이다.

 만일 당신으이 병이 육체적인 것이라 의사의 처방만으로 나을 수 있다면, 당신은 일단 시키는 대로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권하는 것은, 바로 그런 식의 처방이다. 당분간은 자신의 일보다는 타인의 일은 생각하는 연습을 하라. 그것만이 이 병의 유일한 치료법이다.


 이해해 주지 않는다는 생각, 그것은 헛되다. 누군가 나를 이해해 주지 않는다, 제대로 된 평가를 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먼저 상대를 이해하고 정당한 평가를 해주려고 노력하라.

 인생은 언제나 그 당사자에게는 즐겁지 않은 것이다. 생에 대한 애착을 버림으로써 자유를 획득하라. 기꺼기 무거운 짐을 지고, 사소한 안락 따위는 버릴 수 있다고 대범하게 생각하라.



-헤르만 헤세 『젊은 날의 초상』 中에서..
Posted by Tria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