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5. 24. 23:20
유닉스가 특별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자신의 기본적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간결하고 아름다우며, '예외'란 것을 가능한 최소화하는 운영체제이다. 유닉스는 프로세스를 '어떤 것을 하는 어떤것'으로 규정한다. 여기 간단한 예가 있다. 유닉스에서 운영체제에 명령을 내리기 위해 어떤 명령어를 입력하는 것을 의미하는 셸(shell) 명령은 DOS와는 달리 운영체제 속에 내장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키보드로부터 읽은 것을 모니터에 기록하는 일을 할 뿐이다. 유닉스에서 무엇인가를 하는 모든 것은 '프로세스'이다.
...(중략)
반면 유닉스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철학을 지니고 있다. 유닉스는 간단한 기본 구성요소들을 필요에 맞게 결합함으로써 무한히 복잡한 것을 구축할 수 있는 운영체제인 것이다.
p.95~96

운영체제는 당신이 만들어 낸 세상의 헌법이지만, 그 외의 다른 모든 프로그램들은 관습법일 뿐이다.
                                 - p.123


아름다운 방법으로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을 몰라 3일동안 머리를 벽에 부딪혀가며 고민하는 게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지 설명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당신이 한번 그런 과정을 거쳐 문제를 풀어, 더 나은 방법을 발견하고 나면, 당신은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경험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p. 125

리눅스는 훨씬 더 작고, 훨씬 더 단순한 프로그램에서 시작했다. 그것은 모듈성을 강조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미닉스를 이용했을 때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 p. 157
Posted by Triany
2011. 5. 6. 12:08
 

[로마 연합]
   제 2차 포에니 전쟁의 현자유 증인이기도 한 픽토르는 '로마 연합'에 가맹한 동맹국이나  각 지방에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열거했는데, 이 기록을 보면 로마인은 패배자조차 자기들한테 동화시켰다고 말한 플루타르코스나 '로마 연합'을 정치 건축의 걸작이라고 평한 토인비의 주장이 전적으로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세의 우리가 기원전 4세기 초에 로마에 패한 뒤 소멸해버린 줄 알았던 에트루리아 민족은 기원전 3세기 말의 이 시점에서도 5만 명의 보병과 4천 명의 기병을 동원할 수 있는 '로마 연합'의 훌륭한 일원이었다. 또한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에 걸쳐 40년동안이나 로마와 사투를 거듭한 끝에 패배한 삼니움족도 7만 명의 보병과 7천 명의 기병을 동원할 수 있는 '로마 연합'의 동맹자였다.
   로마는 이 패배자들을 피지배민족이라는 소극적인 존재가 아니라 '소키'-이 말은 현대 이탈리아어에 공동 경영자를 뜻하는 낱말로 남아있다.- 라는 적극적인 존재로 대우했다. 그렇기 때문에 가도를 비롯한 로마의 '사회간접자본'설비에서도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이것이 제 1차 포에니 전쟁에서도 승리한 요인의 하나가 되었지만, 한니발과 대결하는 제 2차 포에니 전쟁에서도 로마가 가진 진정한 힘이 되었다.


[한니발과 스키피오 episode]
    자마 전투가 있고 몇 년 뒤에 한니발과 스키피오가 우연히 로도스 섬에서 만나 나누었다는 대화의 발췌문이다. 12세 연상인 한니발에게 스키피오가 정중하게 물었다.
 "우리 시대에 가장 뛰어난 장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니발은 즉석에서 대답했다.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요. 페르시아의 대군을 소규모 군대로 무찔렀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경계를 훨씬 넘어선 지방까지 정복한 업적은 실로 위대하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소."
   스키피오가 다시 물었다.
   "그럼 두 째로 뛰어난 장수는 누굽니까?"
   한니발은 이번에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요. 그는 우선 병법의 대가요. 그리고 숙영지 건설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인식한 사람이기도 하오."
   스키피오는 다시 질문을 계속했다.
   "그렇다면 세번째로 뛰어난 장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카프타고의 명장은 이 질문에도 주저없이 대답했다.
   "그건 물론 나 자신이오."
   자마 전투를 승리로 이끈 업적으로 '아프리카누스'라는 존칭까지 받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이 말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만약 장군께서 자마에서 나한테 이겼다면?"
   한니발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 순위는 피로스를 앞지르고 알렉산드로스도 앞질러 첫번째가 되었을 거요."
  
 
   ....
   고대 로마에서도, 루키아노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든 로마인이 구국의 영웅인 스키피오보다 적인 한니발이 더 뛰어난 장군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해 있었다. 한니발의 불행은 우수한 제자(스키피오)가 적군 쪽에서 나와버렸다는 점이다.
   그리고 한니발은 전략가로서는 큰 잘못을 저질렀다. '로마 연합'을 쉽게 해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점이다. 사회 계급이 고정되어 있는 카르타고 출신의 한니발은 이기면 아량을 베풀어 패자까지도 협력자로 만들어 버리는 로마인의 방식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3차 포에니 전쟁 발발시 그리스 침략)
 기원전 146년은 로마가 '온건한 제국주의'에서 '엄격한 제국주의'로 방침을 바꾼 해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 된다. 같은해에 카르타고가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게 된 것도 불행한 우연이 초래한 결과였다.
Posted by Triany
2011. 5. 5. 21:49

[유쾌한 상상. 유쾌한 가정] 그리스의 위대한 왕.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으로 쳐들어가지 않고 서쪽으로 향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고대에도 역사를 기술할 때 '만약'이라는 가정은 금기로 되어 있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나 자기가 직접 들은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이 역사이고, '만약'이라는 가정을 쓰는 것은 '히스토리아'에서는 올바르지 않은 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고대 역사가들 가운데 이런 종류의 서술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오직 리비우스만은 '유쾌한 가정'이라고 전제해놓고 여기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로마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맞붙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하고.
 리비우스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알렉산드로스가 상대였다 해도 최종적으로는 로마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첫째, 리비우스는 우선 알렉산드로스가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아직 운명이 바뀌기 전인 젊은 나이에 요절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기록에 따르면 애완용 원숭이 두마리에게 물려 생긴 패혈증으로 죽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의 군대에는 지휘관이 대왕 한 사람이었던 반면, 같은 시기의 로마군에는 적어도 11명의 뛰어난 지휘관이 있었다. 로마에는 지휘관 자리가 비어도 대신할 사람이 항상 있었다는 뜻이다.

   둘째, 로마군의 엄정한 규율은 알렉산드로스 군대의 규율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고, 400
년의 유구한 전통을 가진 로마군 병사들의 사기와 10여 년 만에 양성된 마케도니아군 병사들의 사기는 전통으로 보아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지휘관이 사기를 북돋울 수도 있지만, 병사 개개인의 가슴 속에 축적된 자신감이야말로 사기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셋째, 알렉산드로스 개인의 전략과 전술적 재능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마군은 다리우스 왕의 병사들이나 인도 병사들과는 다르다. 로마인은 페르시아인이나 인도인처럼 사치에 익숙지 않았다. 
 실질 강건을 당연하게 여겼던 당시의 로마 남자들과 싸웟다면 아무리 알렉산드로 대왕이라 해도 유약한 민족과 싸울 때처럼 승전에 승전을 거듭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넷째, 로마와 알렉산드로스의 전쟁은 조직과 개인의 대결이고, 알렉산드로스에게 남아 있었던 10여년 기간으로는 아무리 그의 재능이 뛰어났다 해도 효율적으로 기능을 발휘하는 조직에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수는 없었으리라는 것이 리비우스가 든 네번째 이유다.
리비우스는 "전사 개개인은 각자의 운명에 따라 살거나 죽는다. 하지만 로마에서는 한 전사의 죽음이 당장 국가적인 손실과 결부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섯번째 이유는, 마케도니아군과 로마군의 보병군단이 각각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마케도니아의 중무장 보병군단은 한 덩어리가 된 공격에 강하고 방어에도 유리하지만 중대의 연합체인 로마의 중무장 보병군단은 기동성이 뛰어나고 전술 전환에 즉각 응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섯번째 이유는, 적지에서 싸우는 알렉산드로스에 비해 자국 영토안에서 싸울 수 있는 로마군이 유리하다는 것이다. 특히 로마는 '로마 연합'에 가입한 식민지와 동맹국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들은 로마와 긴민한 관계로 맺어져 있어서, 아무리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 해도 이 촘촘한 그물을 간단히 돌파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리비우스가 마지막으로 든 이유는 "알렉산드로스에게는 전투에 패하는 것이 곧 전쟁에 패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로마군의 전통은 전투의 패배가 전쟁의 패배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었다."고 말한다.

                       
-[로마인 이야기 1권.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中에서..]p.234~236

Posted by Triany
2011. 1. 5. 14:37
미셸 푸코 [Michel Paul Foucault, 1926.10.15~1984.6.25]
요약
프랑스의 철학자. 정신의학에 흥미를 가지고 연구했으며 서양문명의 핵심인 합리적 이성에 대한 독단적 논리성을 비판하고 소외된 비이성적 사고, 즉 광기(狂氣)의 진정한 의미와 역사적관계를 파해쳤다.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철학
출생지 프랑스 중서부 프와티에(Poitiers)
주요저서 《광기와 비이성(非理性)》(1961) 《앎[知]의 고고학》(1969)
본문
1926년 10월 15일 프랑스 중서부 프와티에(Poitiers)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외과의사였다. 포스트구조주의의 대표자로 파리대학교 벵센 분교 철학교수를 거쳐 1970년 이래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를 지냈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후 정신의학에 흥미를 가지고 그 이론과 임상()을 연구하였다. 인간의 지식은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고 변화하는지 탐구하였고 해답을 모색하였다. 그 과정에서 각 시대의 앎[]의 기저에는 무의식적 문화의 체계가 있다는 사상에 도달하였다. 또한 업압적인 권력의 구조를 예리한 통찰력으로 파헤쳤으며 정신병의 원인을 사회적 관계속에서 밝혀내려 하였다. 1961년 정신의학의 역사를 연구한 《광기()와 비이성()―고전시대에서의 광기의 역사》에서 서양문명의 핵심인 합리적 이성에 대한 독단적 논리성을 비판하고 소외된 비이성적 사고, 즉 광기()의 진정한 의미와 역사적관계를 파헤쳤다. 이 저술로 푸코는 세계에서 주목받는 철학자로 떠올랐다.

정신병과 사회적 관계를 밝힌《임상의학의 탄생》(1963) 을 저술하였으며 1966년에는 역사를 통해 지식의 발달과정을 분석한 《언어와 사물》을 저술하였다. 서구 지식의 역사는 두 번의 단절된 과정이 있었다고 주장하였고 지식을 연속성을 가진 발달과정으로 보는 기존의 입장을 착각으로 규정하였다. 1969년 《지식의 고고학()》에서는 전통적인 사상사를 비판하였다. 1970년대에 푸코는 부르주아 권력과 형벌제도에 대한 분석의 결과물인 《처벌과 감시》(1975)를 저술하였다. 이 저술에서 푸코는 역사적으로 지배계급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이용한 법률과 억압적 통치구조를 파헤쳤다. 인간의 알고자 하는 의지와 이를 억압하는 권력과의 관계를 주요 주제로 삼았다. 푸코는 지식은 권력과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모든 지식은 정치적이라고 주장하였다. 1984년 6월 25일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으로 사망하였다.

Posted by Triany
2011. 1. 5. 13:16
노암 촘스키 [Avram Noam Chomsky, 1928.12.7~]
요약
미국의 언어학자로서 변형생성문법 이론으로 언어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1960년대부터 활발히 사회운동에 참여하여 미국을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별칭 언어학 혁신의 아버지
국적 미국
활동분야 어학
출생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州) 필라델피아
주요저서 《언어 이론의 논리적 구조》(1955) 《통어론적 구조 Syntactic Structures》(1957) 《통어 이론의 제상 Aspects of the Theory of Syntax》(1965) 주요작품
본문
1928년 12월 7일 미국의 펜실베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유대계 러시아 이민자 가정의 2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William Chomsky)는 저명한 히브리어 연구자였으며 촘스키언어학자가 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언어학, 수학, 철학을 공부했으며, 1955년 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9년에 언어학자인 캐롤 슈워츠 촘스키(Carol Schatz Chomsky)와 결혼했으며, 1950년대에는 아내와 함께 이스라엘의 집단농장인 키부츠(qibbutz)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는 1956년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교수가 되었고, 1966년 석좌교수, 1976년부터는 연구교수가 되었다. 

그는 1951년부터 1955년까지 하버드대학교의 특별 연구원으로 선임되었는데, 이 기간에 《변형 분석 Transformational Analysis》이라는 제목의 박사 논문을 완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변형생성문법 transformational generative grammar》이론의 기본 틀을 정립하였다. 그는 1955년 논문의 내용을 발전시켜 《언어학 이론의 논리적 구조 The Logical Structure of Linguistic Theory》라는 책을 집필하였고,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이 책은 등사판으로 유포되었다가 1975년에 정식 출간되었다). 그리고 《통사 구조 Syntactic Structures》(1957), 《통사론의 여러 측면 Aspects of the Theory of Syntax》(1965), 《생성문법 이론의 여러 문제 Topics in the Theory of Generative Grammar》(1966), 《영어의 음성양식 Sound Pattern of English》(1968, Morris Hall과 공저), 《언어와 정신 Language and Mind》(1968), 《언어지식 Knowledge of Language》(2000), 《최소주의 언어이론 The minimalist program》(2001) 등의 저작으로 변형생성문법 이론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키며 언어학의 혁명을 주도하였다.

촘스키는 현대 언어학의 발달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온 언어학자이다. 촘스키의 변형생성문법 이론은 개개의 언어수행(performance)에 앞서 존재하며 그것을 생성시키는 인간의 보편적인 언어능력(competence)과 언어규칙에 대한 탐구로 언어학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이는 ‘촘스키 혁명’, ‘언어학 혁명’이라고 불릴 정도로 현대 언어학에 획기적 전환을 가져온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그의 언어 이론은 인지과학, 철학, 심리학 등 다양한 학문들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촘스키는 언어학자로서만이 아니라 현실 비판과 사회 참여에 앞장서는 실천적인 지식인으로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1960년대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을 기점으로 다양한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1967년에는 국방성과 국무성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투옥되기도 했다. 그는 저작과 강연, 대담, 영상물 등으로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대외 정책과 정치·경제·매체를 장악한 권력을 비판해 왔으며, 직접 실천 행동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에는 신자유주의 세계질서의 야만성에 대한 비판에도 앞장섰다. 이러한 활발한 사회 참여 때문에 그는 ‘미국의 양심’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인간이면 누구나 자기가 속한 사회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그것을 행동에 옮길 수 있어야 하며, 인간사에 중대한 의미를 갖는 문제에 대한 진실을 그 문제에 대해 뭔가를 해낼 수 있는 대중에게 알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지식인의 책무 Writers and Intellectual Responsibility》(1995)라고 주장했다.

한편 그는 언어학 이외에도 정치학, 철학, 심리학 등의 다양한 주제에 대해 80여 권의 저서와 1천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특히 강대국의 패권적인 대외 정책과 언론, 지식인의 유착 등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활동에 앞장서, 《숙명의 트라이앵글 - 미국,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Fateful triangle : the United States, Israel and the Palestinians》(1983), 《여론조작―매스미디어정치경제학 Manufacturing Consent: The Political Economy of the Mass Media》(1988, 에드워드 허먼과의 공저),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What Uncle Sam Really Wants》(1996), 《그들에게 국민은 없다 Profit over people : neoliberalism and global order》(1999), 《507년, 정복은 계속된다 Year 501, The Conquest Continues》(2000), 《불량 국가 Rogue states》(2001) 등의 저작을 남겼다. 이러한 저작들과 강연, 대담 등을 통해 그는 다국적기업의 이익만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문제와 강대국의 대외 정책에서 나타난 폭력성, 이에 융합된 사회 내의 권력 등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활동을 펼쳤으며, 그의 글들은 세계 각국에서 번역되어 널리 읽히며 큰 영향을 끼쳤다. 

Posted by Triany